이아롬

'생태라는 틀에서의 농업'에 관심이 많습니다.
시골에서 미니피그 키우며 사는 로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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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슬레이브드(Enslaved)’ 노래 틀어줘.”

“밴드 이름이지?”

“응, ‘노예가 되게 하다’라는 뜻이지. 지금 나의 심정을 대변하는 이름이랄까.”

휴일 오전 9시, 나와 동거인은 차가운 도시의 유기농(차도유)농장 텃밭, 찬우물 농장으로 달려가고 있다.

운전면허가 없어 차도유 공동모임이 있는 월요일에는 ‘도시의’ 로이든의 차를 카풀해 다녔는데, 이렇게 급하게 갈 땐 어쩔 수 없이 동거인에게 부탁해 함께 가야 한다.

(사실 나는 요즘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해 시험을 보고 있는데 도로주행에서 두 번 떨어졌다. T.T)

휴일 오전부터 자유로를 달려 찬우물농장으로 가는 이유는 (또!) 플리마켓에 출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유기농펑크를 꾸준히 보는 독자라면 함께 ‘또?!’를 외쳐주셔도 이해한다).

 


또! 플리마켓

 

사실 이전의 기록에 나와있듯, 그동안 플리마켓은 나에게 고난만 가져다 줬다.

 

비가 와 폭망한 도시마켓… #나도울고 #하늘도울고 #유기농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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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원가를 뽑지 못하거나 하나도 팔지 못하다 드디어 ‘마르쉐@’에서 완판하면서 원가를 뽑고 3만원 정도의 수익을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매달 마르쉐에 나가 고객도 만들고 나의 농사를 소소한 취미가 아닌 지속가능한 모델로 바꾸고 싶어 차가운 부스에 출점한 다음 날, 출점신청서를 냈다.

하지만 1달이 넘도록 아무런 피드백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차가운’ 이상린 대표에게 마르쉐의 입장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내가 꽃피는 장(꽃장)과 마르쉐에 출점한 뒤 쓴 글을 읽고 팔리지 않은 물건을 마르쉐에서 치웠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과, 찬우물농장의 부스에서 찬우물농장의 작물이 아닌 것을 가공한 것에 대해서도 문제가 있다는 판단에 회의를 했다는 이야기였다.

마르쉐의 입장도 일부 이해되는 부분은 있다. 하지만 나에게 직접 피드백 했다면 해명하고 사과할 건 사과했을 텐데, 검증이 안된 도시농부에게는 해명의 기회도 없는 걸까.

논란의 원인은 내가 제공했지만, 시민의 참여로 시장을 운영하는 마르쉐가 이런 태도로 셀러를 대하는 것은 아쉬웠다.

초창기부터 출석하며 애정했던 곳이지만 나에 대한 안좋은 선입관을 갖고있는 마르쉐와 관계를 맺는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팔지 못한 꽃장에 나가느니 당분간 플리마켓을 쉬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러다 보안여관에서 ‘세.모.아(세상의 모든 아마추어) 장터’를 매달 열겠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나에게도 꾸준히 출점하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플랫폼이 생긴 것이다.

이번에는 친구와 함께 요리로 출점하게 되어 요리를 테스트 해 볼 재료를 가져오기 위해 찬우물로 달려가는 길이었다.

 

협업은 힘들어

내가 농사지은 완두로 찬 스프를, 찬우물의 당근으로 샌드위치를, 완두와 오이로 샐러드를 만들 생각이었다.

모든 재료를 구해놓고 나와 함께 마켓에 출점할 요리덕후 노란탱자를 모셨다.

그가 싱크대와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우리집에 이런 것도 있었구나, 싶은 식재료와 주방기구들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롬아, 도마가… 이게 전부니?”

“응, 우리가 집도 작고, 간단한 요리만 해 먹는 2인 가구라…”

“이렇게 작은 도마는 작업시간이 오래 걸려서 더 큰 게 있나 물어본 거였어.”

 

“아롬아, 완두가 너무 별로인데?”

내 완두가 두 세가지 품종이 섞이긴 했지만 나는 정말 맛있게 먹었는데, 그는 내가 농사지은 완두의 상태가 나쁘다고 했다.

“이것 좀 봐, 이게 하나는 퍼지고, 하나는 이렇게 쭈글쭈글해. 상태가 고르지 않아서 요리로는 못 쓰겠어. 알도 너무 작고.”

품종이 섞인 거일 뿐인데, 상태가 나쁘다고 하니 농사 지은 내 입장에서는 상처가 됐다.

 

내 손과 밭에서 수확해 온 양파, 당근, 오이. 물을 전혀 주지 않고 비에만 의존해 키웠으니 전반적으로 작긴 작다.

 

“아롬아, 이렇게 채소가 전부 작을 줄 몰랐어. 내가 하려고 했던게 당근을 채 썰어 넣는 거였거든. 이렇게 잘은 당근은 채 썰 때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거든. 양파도 퓨레로 만드려고 했는데 이 크기에 이 양으로는 안될 것 같은데.”

“아롬아, 그렇게 손으로 하나씩 집어 먹지 말아 줄래? 나 그거 정말 싫어하거든.”

“아침부터 농장 갔다오고 주방 정리하느라 지금(오후 4시)까지 물 한 잔 못 마셨거든. 그래서 배는 고픈데 사진 찍으려면 티 안나게 먹어야 할 것 같아서.”

그가 “아롬아”를 부를때마다 내 심장은 쫄깃해졌다. 아침부터 끼니도 거르며 신선한 농작물을 가져왔지만 제대로 된 건 하나도 없었다.

제대로 갖춰진 것 없는 건 우리집 주방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는 요리덕후다운 능숙한 솜씨로 뚝딱뚝딱 요리를 만들어 냈다.

 

참외, 오이, 양파를 깍둑썰기하고 데친 완두를 섞은 샐러드

 

달걀에 직접만든 두부 콩 마요네즈를 넣어 만든 샌드위치

 

완두와 참외로 각각 만든 가스파초(찬스프)

 

내가 만든 유기농 생강청과 친구가 만든 술 지게미를 넣어 만든 막걸리 칵테일

 

이걸 전부 1시간 반만에 아주 맛있게 만들어 낸 친구 덕분에 이 새로운 시도가 걱정되지 않는다.

그래도 뭐, 따지고 보면 점점 나아지지 않았나.

 

 

펑크의 연속!

아, 나에게 새로운 시도는 하나 더 생겼다.

바로 세모아 장터로 지속적인 플랫폼을 제공해 준 보안여관에서 서로의 자본을 교환하는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제안해 준 것.

그리하여 나는 보안여관에 농작물을 일부 심거나 돌봐주고,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받기로 했다.

 

기념으로 농사지을 때 종종 모종을 사오곤 했던 하나로모종에서 받은 방울토마토를 심었다.

 

보안여관의 배려로 오래된 플라타너스 나무, 은행나무와 경복궁 담장이 보이는 근사한 사무실을 얻었다.

 

기반없는 청년이 도시에서 생존하기 위해 시작한 유기농펑크 프로젝트로 나는 직업이 생겼고, 지금은 사무실과 새 커뮤니티가든까지 생겼다. 이게 단 4개월만에 생긴 일이다.

앞으로는 또 어떤 일이 생길까,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두렵지는 않은 펑크같은 일들의 연속이다.

 

이아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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